석남사

석남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2가지의 학설이 있다.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왔던 학설은 도의국사 창건설이다. 이 설은 824년 신라 헌덕왕 때에, 한반도에 최초로 선불교를 들여온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석남사를 창건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당시 도의국사가 중국으로부터 도입한 선종 사상은 당시 신라의 종교문화적 배경에서는 지나치게 혁신적이었기 때문에, 선종은 포교초기 신라 사회에서 사찰을 창건할만큼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도의국사의 제자인 염거화상이 한국 최초의 선불교 교단이자 석남사의 소속 종파이었던 가지산문을 일으킨 것이 859년이라는 점도, 도의국사 창건설을 비판하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배경에 비추어 최근에는 석남사의 창건시기를 신라의 멸망 전후로 보고, 석남사의 창건이 신라가 고려를 항복하도록 설득하는 데에 일조하였던 승려 진공□운(眞空□運) 선사 로 보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창건 이후 석남사는 가지산문의 거점 중 하나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임진왜란 때에 석남사는 전란 속에서 사찰 전체가 소실되었다. 이 때에 소실된 사찰을 1666년에 언양현감으로 있었던 강응(姜膺)이 주도하여 재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도 1791년에 극락전이 지어지고, 1803년에 대웅전을 중수하면서 탱화가 그려졌으며, 1912년에 한 차례 더 사찰이 중건되면서, 석남사는 거듭하여 규모를 키워왔다. 그러나 한국 전쟁 때에 전화에 휩싸이면서, 사찰에 있던 많은 건축물과 시설들이 다시 한 번 소실되었다.

현재의 사찰은 1957년 석남사에 주지로 부임한 비구니 승려, 인홍 노사(仁弘老師)에 의해 차근차근 재건되었다. 1958년 청화당에서 시작된 사찰시설의 재건과 개축은 대웅전, 극락전, 조사전 등으로 이어졌다. 1963년에는 사찰의 많은 시설들이 신축되면서 새롭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재건 과정에서 비구니 수련을 위한 시설들이 갖추어지면서, 석남사는 대한민국 최대의 비구니의 수도처가 될 수 있었다.